빨간벽돌집 딜쿠샤에서 만난 서울의 근대사
붉은 벽돌집, 딜쿠샤와의 첫 만남
광화문 근처에서 점심 산책을 하다 보면, 익숙한 도시 풍경 속에서 묘하게 이질적인 붉은 벽돌집 하나가 눈길을 끕니다. 종로구 행촌동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집은 바로 ‘딜쿠샤(Dilkusha)’입니다.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단순한 서양식 주택을 넘어,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이국적인 외관에 끌려 방문했지만, 내부를 둘러보며 딜쿠샤가 품고 있는 깊은 역사와 건축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주택가 속 붉은 벽돌집의 첫인상
딜쿠샤는 언덕 위 조용한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주변의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서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외관이 단연 돋보였습니다. 마치 유럽의 어느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집은 1923년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으로, 당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건축물이었습니다. 특히, 벽돌을 세워 쌓는 독특한 ‘공동벽 쌓기’ 기법이 적용된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단열과 방음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구조적 안정성을 강화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집 앞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이 아름다운 건축물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역사를 지켜온 공간임을 느끼게 했습니다. 은행나무 아래 서서 딜쿠샤를 바라보니,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테일러 부부와 딜쿠샤의 이야기
딜쿠샤는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가 살던 집입니다. 앨버트는 광산업과 무역업으로 한국에 정착했으며, AP통신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며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의 소식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메리는 영국 출신 배우로,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며 이곳 딜쿠샤에 남다른 애정을 품었다고 합니다.
집 이름인 딜쿠샤는 메리가 인도 여행 중 본 여름 별장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으로, 기쁜 마음과 이상향을 뜻합니다. 이 부부는 일제강점기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딜쿠샤는 그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한 공간으로 기억됩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이국적 감각
딜쿠샤 내부는 당시 테일러 부부가 살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거실에는 서양식 벽난로와 등받이가 높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어 아늑함을 더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공간 전체를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특히 내부 곳곳에서 동서양의 조화로운 디자인이 돋보였는데, 서양식 가구와 장식품 사이로 한국 전통 병풍과 고려청자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또한, 전시된 사진과 기록들은 테일러 부부의 일상과 한국에서의 삶을 생생히 보여주었습니다. 메리가 남긴 그림과 회고록은 그녀가 얼마나 한국 문화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죠. 이런 디테일들은 과거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근대사와 건축미를 담은 공간
딜쿠샤는아름다운 집을 넘어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담고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해외로 타전했던 앨버트 테일러의 업적은 이 집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서양식 건축물 중에서도 희귀한 사례로 평가받는 딜쿠샤는 건축사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원 과정에서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려 한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거실과 침실 등 주요 공간들은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되었으며, 복원된 벽돌 외관 역시 과거의 흔적을 충실히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세심함 덕분에 딜쿠샤는 전시관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산책 중 만난 작은 역사 박물관
딜쿠샤는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입니다. 산책 중 우연히 발견한 이 집은 저에게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다층적인 매력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현대적인 도시 속에서도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광화문 근처에서 점심 산책을 계획하고 있다면, 딜쿠샤를 꼭 방문해 보세요. 붉은 벽돌집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그 속에 담긴 역사는 분명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을 것입니다.